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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이라는 우수한 문화재를 지닌 합천 해인사

almove 2010. 6. 18. 22:54


해인사는 신라시대에 그 도도한 화엄종의 정신적인 기반을 확충하고 선양한다는 기치 아래, 이른 바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로 세워진 가람이다.
화엄종의 근본 경전인 화엄경은 4세기 무렵에 중앙아시아에서 성립된 대승 경전의 최고봉으로서, 그 본디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며 동양문화의 정수라고 일컬어진다.  이 경전에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해인사 이름은 바로 이 '해인삼매'에서 비롯되었다.

해인삼매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한 없이 깊고 넓은 큰 바다에 비유하여, 거친 파도 곹 중생의 번뇌 망상이 비로소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 속에(海)에 비치는(印) 경지를 말한다. 이렇게 여실如實한 세계가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모습이요 우리 중생의 본디 모습이니, 이것이 곧 해인삼매의 가르침이다.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해인사는 해동 화엄종의 초조初祖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의 법손인 순응順應화상과 그 제자인 이정理貞화상이 신라 제40대 임금 애장왕 3년에, 곧, 서기 802년 10월16일에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지금의 대적광전에 자리에 창건하였다.
이리하여 화엄종은 개화기를 맞던 신라시대를 거쳐, 해인사를 중심으로, 희랑希朗대사를 위시하여 균여均如, 의천義天과 같은 빼어난 학승들을 배출하기에 이르른다.
 해인사는 한국불교의 성지이며 또한 세계문화유산 및 국보 보물 등 70여 점의 유물이 산재해 있다. 국내 최대 사찰로서 명산인 가야산 자락에 위치하여, 가야산을 뒤로하고 매화산을 앞에 두고 있어 그 웅장한 모습과 주변 경관이 어우러져 경의로울 뿐 아니라  송림과 산사가 어울어져 연출하는 설경을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경에 젖게 한다.




합천하면 생각나는 곳이 이곳 해인사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생각나는 하나....
199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국보 52호 해인사 장경판전과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서 조선 태조7년에 옮겨진 국보 32호 팔만대장경.
그 곳 해인사에도 조금은 늦었지만 찾아오는 봄의 모습.



해인사를 들어서는 곳에 보이는 상가의 모습.



나무에 지어진 까치집의 모습.
옛말에 까치집이 낮으면 태풍이 잦다고 하던데.
저정도 높이면 태풍이 많이 온다는 이야기 인가?
그리 많이 낮은 위치는 아닌듯..^^



해인사에 입구에서 판매하는 토기.



유명한 절에는 유명한 산과 물이 있다.
물이 너무나 맑다.



해인사를 들어서는 다리.
봄의 초록을 함께 느끼기도록 찍어본사진.
초록의 칼라와 흑백의 다리가 묘하게 매치가 된다.



봄의 초록이 너무 아름다워서 들어서는 길에 계속 찍어댄 봄의 소식 모습들.



후후... 난 돌쌓아놓은게 왜이리 좋을까?
항상 정형적으로 쌓여 있었는데 왠지 비정형적인 보습이 눈에 띄였다.
아마도 이건 연인이 쌓았겠지.
그냥 추측...ㅋ



꼬여 올라간 나무가 상당히 인상적이다.
인위적으로 저렇게 꼬아 놓았을까?
꽈배기처럼 꼬여 있는 것이 너무 신기하다.



원래 붉게 되는 단풍이 있나??
일반적인 붉은 단풍잎보다 조금은 맑은 색을 띄는 붉음.
파스텔톤의 붉음이 햇빛을 받아 무척이나 아름답다.



여기는 유명한 성철스님을 기리기 위한 사리비가 있는 곳의 전경.
성철스님께서는 1936년 해인사에서 동산(東山) 대종사에게 사미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
1938년 운봉화상을 계사(戒師)로 보살계·비구계를 받았고,
그 뒤 봉암사(鳳巖寺)에서 청담(靑潭) 등과 함께 수행하며 부처님답게 살 것을 결사하는 등 새로운 선풍(禪風)을 고양시켰다
성철스님의 유명한 법어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수행하는 사람이 자그마한 깨달음을 얻었을때에는 물이 산으로, 산은 물로 보이는 혼돈을 겪게 되지만, 깨달음의 수준이 자라면서 물은 물로, 산은 산으로 보게 된다는 즉, 만물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는 지혜를 갖게 된다는 법어이다.



해인사를 들어서는 곳에 보이는 안내도.



주차를 하고 약 20여분을 걸어서 도달한 가야산 해인사의 일주문.
여기서부터 실질적인 해인사의 시작.



해인사 일주문 앞에 세워져 있는 이 지주는 불, 보살의 위신력과
공덕을 표시한 깃발을 매어 달기 위해 기둥을 세우는 곳인 당간지주의 모습.





해인사 입구에 위치한 고사목의 모습.
신라 애장왕시절(서기 802년)에 해인사 창건을 기념해 식수한 느티나무이다.
1945년에 수령을 다하고 고사해 둥치만 남아 해인사의 장구한 역사를 해주는 고사목.



문을 이어 다시 문이 이어지고 그 문과 문을 이어주는 계단.
절을 가보면 자주 보이는 광경이지만 왠지 저 문옆을 지나치는 것보다
꼭 저문을 통해서가야 왠지 제대로 된 사찰을 향해가는 듯한 기분.
그리고 소원빌어야 할 것 같은 느낌....



인상적이어서 찍어본 굴뚝.
울타리 넘어로 나무와 함께 조용히 올라선 굴뚝이 튀지 않고 자연과 잘 동회되는 느낌.





여기까지가 해인사의 대적광전을 들어서는 입구.





대적광전의 모습.

대적광전이란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 모신 사찰 당우 중의 하나.
화엄종의 법맥을 잇는 사찰에서 본전(本殿)으로 건립하며, 청정한 법신불(法身佛)인 비로자나불은 항상 고요와 빛으로 충만한 상적광토(常寂光土)에서 설법한다고 한〈화엄경〉에 근거한다는 뜻에서 화엄전(華嚴殿), 〈화엄경〉의 주불(主佛)인 비로자나불을 봉안하므로 비로전(毘盧殿)이라고도 한다. 원래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보신불(報身佛)인 아미타불과 화신불(化身佛)인 석가모니불, 즉 삼신불(三身佛)을 봉안함으로써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를 상징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선종(禪宗)의 삼신설에 의해 비로자나불의 좌우에 노사나불(盧舍那佛)과 석가모니불을 봉안하는 경우가 많으며,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봉안하기도 한다. 삼신불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불을 봉안하여 오불(五佛)을 봉안하기도 하는데, 이는 약사전(藥師殿)과 극락전(極樂殿)을 대적광전에서 함께 수용한 형태로 우리나라에서 중요하게 신봉되는 불·보살을 한 곳에 모아둔 셈이다. 아미타불의 좌우 협시보살로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약사불의 협시보살로는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을 봉안한다. 후불탱화(後佛幀畵)로는 보통 법신탱·보신탱·화신탱 3폭을 각각 불상 뒤에 봉안하는데, 전각의 규모에 따라 1폭의 삼신탱(三身幀)을 봉안하기도 한다. 또한 대적광전의 위치가 대웅전과 대등할 경우에는 신중을 모신 신중단(神衆壇)과 영가를 모신 영단(靈壇)이 함께 마련되며 신중단에는 신중탱화를, 영단에는 감로탱화(甘露幀畵)를 봉안한다. 경상남도 합천군 해인사의 대적광전과 전라북도 완주군 위봉사의 보광명전 등이 대표적이다.



단청의 모습.
우리나라이 구조물은 항상 흑백의 느낌을 강하게 가지고 있지만 이 단청만큼은 수려한 색을 자랑한다.
그리고 그 수려한 색은 겉으로 드라는 곳에 있기보다는 지붕의 밑에서 조용히 빛을 발하는 모습이
우리나라의 내적 아름다움을 중요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의적인 생각을 해본다.



부처님오신날이 가까이 다가 오는지라 여기도 수많은 연등이 맞아주고 있었다.

















유명한 세계문화자산인 팔만대장경이 있는곳.
이곳은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어서 사진을 담아오지 못했다는...ㅎㅎ

팔만대장경 - 고려 고종대에 판각되어 현재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대장경.

국보 제32호. 목판본은 1,516종에 6,815권으로 총 8만 1,258매인데 이 가운데 후대에 판각된 15종의 문헌은 보유판(補遺板)이라고 한다.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과 속장경(續藏經)이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된 뒤 1236년(고종 23) 당시의 수도였던 강화에서 시작하여 1251년 9월에 완성되었다. 이 사업은 대장도감(大藏都監)에서 주관했으며, 제주도·완도·거제도 등에서 나는 자작나무를 재료로 사용했는데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먼저 나무를 바닷물에 절인 다음 그늘에서 충분히 말려 사용했다. 이 대장경은 조선 초기까지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해인사로 언제 옮겨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현재 1398년(태조 7)에 옮겼을 것이라는 학설이 가장 유력하며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이때 2,000명의 군인들이 호송하고, 5교양종(五敎兩宗)의 승려들이 독경(讀經)했다"라고 한다.

이것은 현존하는 세계의 대장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일 뿐만 아니라 체재와 내용도 가장 완벽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보관함의 순서는 천자문 순서대로 배열했으며, 오자(誤字)와 탈자(脫字)가 거의 없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색에 의해서 그 내용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첫째, 인류 최초의 한문대장경인 송나라 관판대장경(官板大藏經)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며, 현재 전하지 않는 거란판대장경(契丹板大藏經)의 내용을 짐작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특히 〈대승법계무차별론 大乘法界無差別論〉 권1은 어느 대장경에서도 볼 수 없다. 둘째, 사전류의 저술들이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법원주림 法苑珠林〉·〈일체경음의 一切經音義〉·〈속일체경음의 續一切經音義〉 등 중요한 전적과 〈대승보살정법경 大乘菩薩正法經〉·〈제법집요경 諸法集要經〉 등 중요한 대승경론이 포함되어 있다. 셋째, 자체(字體)의 예술성이다. 하나의 목판에 대략 가로 23행, 세로 14행으로 310자 내외를 새겼는데 그 정교한 판각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조선의 명필인 한석봉은 이를 두고 "육필(肉筆)이 아니라 신필(神筆)이다"라고 경탄했다. 이 팔만대장경은 뒤에 5차례나 간행·유포되었다는 역사기록이 있는데 고려말에 이색(李穡)이 인출한 대장경 1부가 여주 신륵사에 봉안되어 있으며, 조선 초기까지 왜구들이 빈번하게 침략해와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대장경판을 요구했는데 1389~1509년에 83차례나 요구했지만 대부분 거절하고 간혹 인본(印本)을 주었다고 하며, 1410년(태종 10) 경기도 황해도 충청도 관찰사에게 도내에서 생산되는 인경지(印經紙) 267묶음을 해인사로 보내 인경(印經)하도록 명했으며, 세조는 신미(信眉)·수미(守眉)·학열(學悅) 등으로 하여금 해인사 대장경 50부를 인출하여 각 도의 명산 거찰에 나누어 봉안하도록 했으며, 1898년 용악(聳岳)이 4부를 인출하여 통도사·해인사·송광사 등에 1부씩 봉안했다. 고려 중반부터 장경도량(藏經道場)이라는 이름으로 봄·가을에 6, 7일씩 거의 정기적으로 법회를 열었으며, 현재 해인사에서는 1년에 1번씩 대장경판을 머리에 이고 탑 주위를 도는 행사를 하고 있다.

팔만대장경의 특수성은 첫째, 사상적인 것으로 국토가 유린된 상황에서 이 커다란 불사(佛事)를 통해 경전을 수호한 호법적(護法的) 성격을 띠었다는 것이다(→ 호국신앙). 이규보(李奎報)의 〈군신기고문 君臣祈告文〉은 이 대장경조조의 사상적 의의를 천명한 글로 몽골을 야만시하고 문화적 긍지를 드러내고 있다. 둘째, 경제적인 것으로 대장경의 역사(役事)에 대한 막대한 경비를 정부가 부담하므로 국민에 대한 재투자적인 면이 고려되었다는 것이다. 셋째, 내용적인 것으로 과학적인 배열과 엄격한 자료수집으로 정평이 나 있는 것이다. 고려대장경 이후에 편집된 중국판 빙가장경, 일본판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脩大藏經) 등은 모두 이것을 모본으로 하여 판각된 것이다. 즉 이 팔만대장경은 현존하는 한문대장경의 완벽한 '연원'이라고 할 수 있다.

1976년 동국대학교에서는 팔만대장경의 원본을 영인 축소하여 영인본 47권과 전대장경에 대한 내용·주소(註疏)·번역자·연구서 등을 상술한 해제 색인본 1권을 합쳐서 총 48권을 간행했다. 또한 1967년부터 이 한문본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한글판 대장경을 간행하고 있는데 현재 120권이 출판되었다.







절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풍경.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저소리를 들을 때면 맘이 참 편해지고 청아해진다.



여기가 어딘지를 알아 왔어야 하는데.
조용히 앉아 있는 모습이 좋아 사진만 찍어 왔더니 어딘지를 모르겠다는.



비석과 높은 담.



돌틈으로 질긴생명력을 보여주는 잡초.
햇볕을 받으려고 기를 쓰고 앞으로 나와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요새는 어딜가든 절에는 이런 동자승 인형을 자주 볼 수 있는 듯.
그런데 하나 같이 개구장이 같은 느낌의 동자승들.

























해인사에서 차로 5분정도 가면 볼 수 있는 용문폭포.
손각대를 사용했더니 많이 흔들려 버렸다는.



해인사하면 팔만대장경이 생각나고 팔만대장경하면 해인사가 생각이 난다.
그만큼 둘은 뗄래야 뗄수 없는 우리나라의 문화재이다.
일반적인 박물관이 아니라 사찰내에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다 보니 좀 넘어서는 바램일 수 도 있지만,
대장경이 어떤 것이고 그리고 왜 중요한지를 알 수있는 작은 박물관 같은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든다.
비록 본판 대장경을 볼 수 없더라도, 그대로 복원 해 놓은 대장경을 간접 체험해 볼 수 있는 그런 박물관 말이다.
사실 대장경을 보고 왔지만 피부로 느끼는 게 없는 아쉬움에 해 본 생각.
그렇게 우리의 고유 문화재를 느껴보고 우리나라 문화의 우수성을 느껴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
나쁘지는 않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