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302호. 둘레 1,385m. 지정면적 22만3108㎡. 현재 성벽과 동·서·남 문지(門址)와 옹성(甕城 : 성문 앞을 가리어 빙둘러쳐 성문을 방어하는 작은 성) 등의 시설이 남아 있다.
고려시대 후기에 왜구가 자주 침입하므로 1397년(태조 6) 이곳 출신의 절제사(節制使) 김빈길(金贇吉)이 흙으로 읍성을 쌓았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1424년(세종 6) 9월부터 토축의 읍성을 석축으로 고치면서 본래보다 넓혀서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1450년경에는 석축으로의 개축이 거의 마무리에 이르렀는데, 이 때의 둘레는 2,865척이고, 성벽의 높이는 평지에서 9.5척, 높은 곳은 8.5척이었으며, 여장(女墻 :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이 420개로 높이가 2.5척이었다고 한다.
이 때는 옹성이 없이 문이 세 곳이었고 적대(敵臺 : 성문 양 옆에 돌출시켜 옹성과 성문을 지키는 방형의 대)는 12개가 계획되었으나 4개가 만들어졌다. 당시 성안에는 우물 2개와 연못 2개가 있었으며, 성밖의 해자(垓子 : 성밖으로 둘러 판 못)는 파지 않았다.
문의 보호시설인 옹성은 그 뒤에 설치되고, 여장도 무너진 다음 다시 수축을 거듭하여 오늘날에 이르렀으나, 여장은 모두 무너졌다. 현재 남아 있는 읍성은 체성(體城)의 축조에 있어서나 적대를 갖춘 점에서 조선 초기의 양식을 그대로 보여 준다.
성은 낮은 구릉을 포함한 평지에 동서 방향으로 기다란 장방형에 가깝다. 문은 동문(樂豐樓)·남문(雙淸樓였다가 鎭南樓로 됨)·서문(樂秋門)의 세 곳이 터를 남기었고, 옹성은 남·서문터에서만 흔적을 볼 수 있다. 적대는 동문터의 좌우에 하나씩, 동북·동남쪽의 모서리에 하나씩 있어서 ≪문종실록≫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성벽은 동문터의 남쪽 부분에 가장 잘 남아 있어 높이 4.2m, 위쪽 너비 3∼4m, 아래쪽 너비 7∼8m에 달한다. 성벽은 아래쪽에서부터 커다란 깬돌을 이용하여 쌓아올리면서 틈마다 작은 돌을 쐐기박음하였으며, 위쪽으로 갈수록 석재가 작아지고 있다.
현존하는 조선시대의 읍성들 가운데 가장 완전히 보존된 것들 중의 하나이며, 특히 성 안의 마을이 전통적인 면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1984년부터 낙안읍성민속마을보존정비계획을 수립하여 연차적인 사업으로 그 보존을 위한 정비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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